과학의 최전선에서 전하는 인사이트 『요주의 과학』 안녕하세요 여러분, 『요주의 과학』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 삶과 미래를 지탱하는 두 가지 ‘투자’를 살펴봅니다. 먼저 역대 최대 규모인 35.5조 원의 정부 R&D 예산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연구개발에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투자가 좋은 연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이 필요한지 김도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님의 발표와 함께 들여다봅니다. 이어서는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다시 한번 존재감을 드러낸 에어컨 이야기입니다. 120여 년 전 인쇄공장의 습도를 잡기 위해 탄생한 기술이 어떻게 우리의 도시와 생활을 바꾸었는지, 그리고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어떤 새로운 숙제를 안게 되었는지도 살펴봅니다. 좋은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비를 잘 쓰는 방법이, 더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현명하게 쓰는 방법이 필요하겠죠. 35.5조 원의 연구비부터 여름날 우리를 살려주는 시원한 바람까지, 이번 주 『요주의 과학』과 함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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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도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님입니다. 김 교수님은 연구실 안에서만 과학기술을 바라본 학자가 아니세요.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교수와 공과대학장을 거쳐 제51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대통령 소속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초대 위원장, 울산대학교와 POSTECH 총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래서 김 교수님이 정부 R&D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조금 더 특별한 무게가 있습니다. “연구비가 얼마나 많은가”만이 아니라, 그 돈이 어떤 제도와 구조를 거쳐 연구자에게 전달되고, 실제 연구 현장에서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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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R&D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올해 대한민국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은 35조 5천억 원입니다. 역대 최대 규모입니다. 2024년 26.5조원으로 크게 줄었던 R&D 예산은 2025년 29.6조 원을 거쳐 2026년 다시 큰 폭으로 늘었습니다. 정부가 올해 쓰기로 한 전체 예산의 약 4.9%가 R&D에 배정된 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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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김도연 명예교수님은 발표집 「대한민국 정부 R&D, 이상과 현실」에서 이런 바람을 밝힙니다. “우리나라 예산의 5%는 R&D에 넣는다는 내용을 법제화했으면 좋겠다.” 수치만 놓고 보면 2026년 대한민국은 그 ‘5%’에 거의 도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 R&D의 문제도 거의 해결된 걸까요? 답은 아마도 “그렇지 않다”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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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원래 연구개발에 돈을 아끼는 나라가 아닙니다. 정부와 민간을 모두 합친 국내 총 R&D 지출은 2024년 기준 GDP의 5.13%에 달합니다. OECD 평균 2.7%의 거의 두 배이며, OECD 국가 중에서도 이스라엘 다음으로 높은 수준입니다. 그러니 이제 “R&D에 얼마를 더 쓸 것인가?”가 아니라, “그 많은 연구비가 연구자가 가장 잘 연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는가?”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R&D에서 R(Research)은 돈으로 지식을 만드는 일, D(Development)는 지식으로 돈을 만드는 일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김 교수님은 이상과는 달리, 정작 연구자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설명하십니다.
김 교수님은 특히 우리 정부 R&D의 문제를 ‘불신’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선정평가, 단계평가, 최종평가, 추적평가…. 연구비가 제대로 쓰이는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겹의 평가 장치를 만들었지만, 관리가 촘촘해질수록 연구자가 연구보다 행정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는 역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죠. 여러 부처와 전문기관에 R&D 사업이 나뉘어 있는 분절된 지원 시스템, 과학기술부 장관의 짧은 임기에서 드러나는 장기적 리더십의 부재도 함께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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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지금 정책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제도는 계속해서, 조금씩 변화하는 중입니다. 정부가 마련한 제5차 국가연구개발 성과평가(2026~2030년) 방향에는 평가등급 폐지, 일부 기초연구의 단계평가 면제, 연구제안서 간소화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정부출연연구기관 역시 과제 수주 중심의 PBS(Project Based System) 단계적 폐지를 추진하며 기관의 임무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방향으로 재정구조를 바꾸고 있습니다. 20여 년간 계속 늘어난 연구비만큼이나 이제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믿고 맡길 것인가’로 R&D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중요해지고 있는 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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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성과 책임, 장기 연구와 단기 성과, 기초과학과 산업화 그런데.. 연구자에게 더 큰 자율성을 주면 창의적인 연구가 늘어날까요? 그렇다면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연구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확보해야 할까요? 정부 R&D는 결국 이 서로 충돌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김도연 교수님의 발표집을 통해 1950년대 원자력 연구에서 시작해 과학기술처 설립, 정부출연연구기관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시행착오까지 따라가다 보면, 오늘의 R&D 제도가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35.5조 원의 시대, 대한민국 R&D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돈일까요, 아니면 돈을 쓰는 새로운 방식일까요? 숫자 뒤에 숨어 있는 대한민국 정부 R&D의 역사와 구조가 궁금하다면, 김도연 교수님의 「대한민국 정부 R&D, 이상과 현실」 발표집에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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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이 인류를 구했다? 뜨거워진 지구가 던지는 ‘냉방의 역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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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도 너무 덥다”… 이제 정말 이래도 되나요? 덥습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덥습니다. 휴가를 다녀왔더니 베란다에 있던 식물이 말라 죽어 있었습니다. 물을 조금 덜 줘도 끄떡없던 녀석인데, 이번 더위는 식물에게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엄살이 아닙니다. 지난 8월 2일 경남 양산의 기온은 42.5도까지 치솟았습니다. 122년 기상관측 역사상 최고 기록입니다. 지구 반대편 유럽도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WHO 유럽지역사무소의 한스 클루게 소장은 최근 4년(2022~2025년) 동안 WHO 유럽지역 53개국에서 20만 명 넘게 폭염으로 숨졌다며, 그 대부분이 예방할 수 있었던 죽음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유럽환경청(EEA)이 이제 건물의 과열을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건강과 사회 불평등의 문제로 보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8월 7일까지 국내 온열질환 사망자는 26명입니다. 물론 한 명의 피해도 가볍게 볼 수 없지만, 유럽과 비교하면 차이가 큽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눈에 띄는 차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에어컨입니다. 유럽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약 20% 수준인 반면 일본은 약 91%, 한국은 무려 98%에 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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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가 생성한 인류의 구원자 윌리스 캐리어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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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마다 소환되는 ‘인류의 구원자’ 그래서 폭염이 찾아올 때마다 인터넷에서 느닷없이 추앙받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Willis Haviland Carrier)입니다. 현대적인 공기조화 기술, 쉽게 말해 에어컨의 아버지입니다. 한여름 커뮤니티에서는 “이분이야말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어야 한다”, “인류를 구한 진짜 위인”이라는 찬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에어컨을 켜는 순간만큼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캐리어가 처음부터 사람을 시원하게 해주려고 에어컨을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1902년 뉴욕의 한 인쇄공장에서는 여름만 되면 높은 습도 때문에 종이가 뒤틀리고 인쇄 품질이 떨어지는 문제가 반복됐습니다. 캐리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 난방 시스템의 아이디어를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뜨거운 증기 대신 차가운 물을 파이프로 보내 온도와 습도를 낮추는 ‘공기조화’ 시스템을 고안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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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현대식 에어컨의 첫 번째 고객은 더위에 지친 사람이 아니라 습기에 고생하던 종이와 기계였던 셈입니다. 요즘도 어떤 산업현장에서는 정밀기계와 로봇을 보호하기 위해 냉방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데, 정작 옆에서 일하는 사람은 더위를 견뎌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120여 년 전과 묘하게 겹치는 장면입니다. “기계야, 너는 시원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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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여름 영화관 앞에 줄을 선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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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을 살리고, 도시의 지도까지 바꾸다 하지만 에어컨은 곧 공장의 문을 박차고 사람들의 일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극장이었습니다. 1920년대만 해도 여름 극장은 그리 매력적인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영화관은 어두워야 하니 창문을 열기도 어려웠고, 관객들은 손부채를 들고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뉴욕 타임스 스퀘어의 리볼리 극장이 캐리어의 대형 냉방 설비를 도입합니다. 극장 앞에는 당당하게 “It’s Cool Inside!”, 즉 “안은 시원합니다!”라는 문구가 내걸렸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극장으로 몰려들면서 여름은 영화관의 비수기에서 성수기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영화계의 ‘여름 블록버스터’ 전통이 에어컨과 함께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에어컨은 도시의 지도도 바꿨습니다. 1950년대 미국 주택에 냉방시설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이전에는 너무 덥고 습해 대규모 도시가 발달하기 어려웠던 남부와 서남부 지역이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휴스턴, 피닉스, 애틀랜타, 라스베이거스 같은 이른바 ‘선벨트(Sun Belt)’ 도시들입니다. 열대지역인 싱가포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리콴유 초대 총리가 에어컨을 “20세기 최고의 위대한 발명품”이라고까지 평가했을 정도입니다. 냉방은 단순히 방 하나를 시원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디에서 일하고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를 바꾼 기술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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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원해질수록 지구는 더 뜨거워진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폭염이 심해지면 우리는 에어컨을 더 오래 켭니다. 그러면 전력 소비가 늘어납니다. 그런데 세계의 상당수 전력은 아직도 화석연료에 의존합니다. 더 많은 에어컨을 돌리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면 지구는 다시 더 뜨거워집니다. 이 기묘한 순환을 ‘냉방의 역설(Cooling Paradox)’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글로벌 쿨링 워치 2025’ 보고서를 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 냉방 장비가 소비한 전력은 약 5,000테라와트시(TWh)로 추산됩니다. 미국 전체의 연간 전력 소비량을 웃도는 규모입니다. 앞으로는 더 큰 변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냉방 수요가 늘어나는 데다 인공지능 산업까지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AI 데이터센터에는 엄청난 수의 반도체가 쉼 없이 돌아가고, 여기서 발생하는 막대한 열을 식히기 위해 다시 대규모 냉각 설비가 필요합니다. UNEP는 지금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50년 세계 냉방 관련 전력 수요가 약 1만8,000TWh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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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쓰면 좌파, 에어컨 쓰면 우파? 그렇다고 냉방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폭염 속에서 에어컨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인프라이기 때문입니다. 켜면 지구가 더워지고 끄면 사람이 죽는 이 딜레마를 지금 가장 시끄럽게 앓고 있는 곳이 유럽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내년 4월 대선의 쟁점으로 ‘에어컨 규제 완화’가 떠올랐습니다. 극우 국민연합(RN)은 전국 보급 확대를 공약했고, 에어컨이 좌파가 강요해 온 이념적 금기였다고 몰아붙였습니다. 반대편에 선 좌파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는 전국적인 에어컨 보급이 오히려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잘못된 해법이라며 녹지 확대와 건물 단열을 대안으로 내놨습니다. 소셜미디어에는 에어컨에 히틀러 얼굴을 합성한 이미지까지 등장했습니다. 여름에는 구세주, 겨울에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도 계절에 따라 캐리어를 바라보는 인터넷의 평가도 극과 극을 오갑니다. 한여름에는 “인류 최고의 발명가”, “왜 노벨상을 안 줬느냐”며 추앙하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슬며시 “가만 보니 환경파괴 기계를 만든 것 아니냐”는 농담이 등장합니다. 물론 밈일 뿐이지만, 생각해보면 꽤 절묘합니다. 에어컨은 지난 100여 년 동안 더운 지역에서도 사람이 일하고, 공부하고, 영화를 보고, 거대한 도시를 건설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공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숙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더 많이 식혀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세상을 더 뜨겁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어쩌면 여름마다 소환되는 캐리어의 얼굴에는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위기의 딜레마가 그대로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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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 최종현학술원 과학혁신2팀 | 이주섭 팀장, 이우원 PM, 전소민 P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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