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팔겠다는데, 중국은 시큰둥? 최근 미·중 반도체 갈등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2025년 4월 엔비디아의 중국용 저사양 AI 칩 H20에도 수출 허가를 요구하며 규제를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2025년 12월 트럼프 대통령은 엔비디아의 고사양 AI 칩 H200의 중국 수출을 허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중국을 계속 압박하다가는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자립 본능만 키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깔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국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습니다. 미·중 정상회담 이후에도 엔비디아의 중국 판매가 곧바로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미국은 “이제 팔아도 된다”고 손을 내밀었는데, 중국은 “그걸 꼭 사야 하나?”라는 표정을 지은 셈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그 배경에는 화웨이가 있습니다. 혁신으로 맞서는 제제 화웨이는 2019년 미국 제재를 정면으로 맞은 대표 기업입니다. 스마트폰 사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첨단 반도체 접근도 막혔습니다. 그런데 화웨이는 이 위기를 비용 절감의 계기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구개발 투자를 늘렸습니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매출의 15% 안팎을 R&D에 썼고, 2021년에는 이 비중이 22.4%까지 뛰었습니다. 이후에도 4년 연속 20%대의 높은 R&D 비중을 유지했습니다. 전체 직원의 절반이 넘는 11만 3천 명을 R&D 인력으로 채웠습니다. 그 결과가 화웨이의 AI 반도체와 시스템입니다. 화웨이의 단일 AI 칩 성능은 여전히 엔비디아 최고 제품보다 뒤처진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런정페이 화웨이 창업자도 단일 칩 성능에서는 미국보다 한 세대 뒤처져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다만 그는 부족한 단일 칩 성능을 클러스터 컴퓨팅, 즉 여러 칩을 대규모로 묶어 쓰는 방식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화웨이의 CloudMatrix 384는 384개의 어센드 910C 칩을 하나의 거대한 AI 연산 시스템으로 묶습니다. 칩 하나하나는 엔비디아보다 약할 수 있지만, 시스템 전체로 밀어붙이면 실용적인 성능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접근입니다. 조금 투박하게 말하면, 인해전술입니다. 그리고 중국은 이런 집단전에 강합니다. 정부가 설계하고, 시장이 달린다 여기서 중국식 혁신 체계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혁신의 설계자들』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중국 혁신의 중심에 정부가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은 이를 ‘신형 거국체제’라고 부릅니다. 거국체제라는 말만 들으면 마오쩌둥 시대의 지령식 동원 경제가 떠오르지만, ‘신형’이라는 수식어가 중요합니다. 시장을 무시하고 정부가 명령만 내리는 방식으로는 첨단기술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중국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방향을 정하고, 자원을 모으고, 되는 분야에는 더 큰 자금을 몰아줍니다. 시장 수요도 보고, 기업의 실행력도 쓰고, 대학과 금융도 끌어들입니다. 중국 정부는 단순한 심판이 아닙니다. 때로는 설계자이고, 때로는 조정자이며, 때로는 가장 큰 고객입니다. 정책적으로 없던 시장을 만들고, 민간 기술을 직접 구매하며, 지방정부와 국유자본을 통해 특정 산업의 초기 위험을 떠안습니다. 방향이 정해지면 자원은 빠르게 집중되고, 학습 속도는 올라갑니다. 최종 목표는 분명합니다. 자립입니다. 중국이 반도체를 키우는 법 이 흐름을 가장 예민하게 봐야 할 분야가 메모리 반도체입니다. 대표적인 기업이 창신메모리, CXMT입니다. 창업자 주이밍은 칭화대 물리학과를 거쳐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베이징에서 플래시 메모리 설계회사 기가디바이스를 창업했습니다. 이후 중국제조 2025 흐름 속에서 허페이시의 지원을 받아 D램 기업 CXMT를 세웠습니다. CXMT는 겉으로는 민간기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방정부 자본과 정책 목표가 깊숙이 들어간 회사입니다. 허페이시 산하 투자기관이 초기 자금의 대부분을 부담했고, 기가디바이스는 기술과 인력, 경영 역량을 제공했습니다. 이른바 ‘허페이 모델’입니다. 여기서 대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 국책 싱크탱크 DSET의 분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DSET은 중국이 대만 반도체 기업을 압박해온 방식을 하나의 반복 가능한 산업 전략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지방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해 챔피언 기업을 유치합니다. 부족한 기술은 대만과 같은 외국 기업과의 합작으로 채웁니다. 이후 대규모 정부 자금을 투입해 생산 능력을 빠르게 늘리고, 보조금을 등에 업은 가격 덤핑으로 해외 경쟁사를 몰아냅니다. 이러한 과정은 이후 인접한 산업으로 목표를 옮겨 반복됩니다. 그리고 허페이시가 다음으로 착수한 사업이 바로 2016년 설립한 메모리 반도체 기업 CXMT였습니다. 한국의 가장 강한 패가 표적이 될 때 그렇다면 한국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DSET의 조언은 곱씹어볼 만합니다. 반도체 스타트업과 차세대 기술 기업이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투자 환경을 만들고, 필수 소재·장비·기술의 대중국 이전을 통제하기 위한 국제 공조를 강화하며, 미국의 제조 생태계 복원 과정에서 단순 생산 파트너가 아니라 핵심 설계 파트너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을 AI 리더로 만든 혁신의 설계자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중국을 막연히 과장하지도, 쉽게 깎아내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보여주는 중국 혁신의 본질은 천재 한두 명의 성공담이 아닙니다. 정부가 방향을 정하고, 지방정부가 돈을 대고, 기업이 실행하고, 시장이 검증하고, 대학이 인재를 공급하는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낭비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집중되고 효율이 높아지면, 몇몇 분야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습니다. 한국 반도체의 미래는 여전히 밝습니다. 하지만 밝다는 말과 안전하다는 말은 다릅니다. AI 시대의 메모리는 한국의 가장 강한 카드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겨냥될 카드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