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레터

[요주의 과학] vol.33 칩 위에서 피워낸 생명, 손끝에서 찾아낸 위로

2026. 05. 19

 

과학의 최전선에서 전하는 인사이트 『요주의 과학』

 

안녕하세요 여러분, 『요주의 과학』입니다.

 

우리는 흔히 과학과 기술 발전의 목적을 ‘효율’과 ‘속력’에서 찾곤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가장 차갑고 딱딱한 기술이 생명의 본질을 향하기도 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단순한 장난감이 현대인의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과학적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연결'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첫 번째는 기계와 생명의 경계를 허물며 실험실 위에서 새로운 생명을 피워내는 '미세생리학적 시스템' 이야기이며, 두 번째는 무한 반복되는 슬라임과 키캡의 자극 속에서 안정감을 찾는 우리 뇌의 연결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번 주도 『요주의 과학』과 함께 새롭고 흥미로운 과학의 세계로 떠나보시죠.

1 더하기 1이 3이 되는 순간

이번 호의 주인공은 고려대학교 기계공학부 정석 교수님입니다. 정석 교수님은 기계공학과 미세유체공학을 바탕으로 오가노이드(Organoid)와 미세생리학적 시스템(Microphysiological Systems, MPS) 분야를 선도하는 연구자이십니다. 학계의 첨단 연구를 실제 산업과 의료 현장으로 생생하게 연결하는 의공학 혁신을 주도하고 계신답니다.
 
교수님과 함께, 생명과 기계의 경계를 허무는 '미세생리학적 시스템'의 세계를 들여다보겠습니다.

발생(Emergent)

 

정석 교수님이 연구실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Emergent(발생)'입니다. 생물학적 시스템은 단순히 부품을 조립한다고 만들어지지 않고, 세포와 세포가 서로 만나 연결될 때 예상치 못한 새로운 기능이 툭 튀어나오는 특성을 지녀요. 교수님은 이를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라 3이나 4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마법을 실험실에서 재현하기 위해 정 교수님은 오가노이드*가 자라는 '그릇'에 주목했습니다. 기존의 오가노이드는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으로 만들어지는 한계가 있었는데, 기계공학적 관점에서 그릇의 공간을 정교하게 설계해 제약을 준 것입니다. 마치 네모난 틀에서 네모난 수박을 기르듯 오가노이드들을 균일하고 정밀하게 '규격화'하는 데 성공했죠.
 
그리고 이렇게 균일해진 오가노이드를 '칩(Chip)'에 넣음으로써, 혈관이나 신경 같은 다른 기관과 접목하기 훨씬 수월한 환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오가노이드와 칩 기술이 정교하게 결합된 이 기술은 이제 실제 산업과 의료 현장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답니다.
 
*오가노이드: 줄기세포를 3차원으로 배양하여 만든 실제 장기와 유사한 구조와 기능을 갖도록 만든 장기 유사체
Biomaterials(2021), Wikimedia Commons

동물 실험의 종말

 

이러한 칩과 오가노이드 기술의 가장 큰 임팩트는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켜온 '동물 실험'의 시대를 끝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동물 실험을 통과한 약물이어도 무려 90% 이상이 임상 단계에서 최종 승인에 실패한다고 해요. 인간과 동물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죠. 2021년 미국 랜드 폴 상원 의원은 2035년까지 동물 실험을 대폭 줄이고 첨단기술 대체 시험 결과를 인정하는 내용의 'FDA Modernization Act'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핵심은 동물 실험 대비 오가노이드 실험이 얼마나 더 빠르고 저렴하며 정확하게 결과를 낼 수 있는가로 옮겨가고 있어요.

감각을 느끼고 생각하는 '연성 임플란트'를 향해

 

정석 교수님 연구실은 칩 위에서 혈관을 이을 뿐만 아니라, 정교한 여러 층의 피부 모델을 만들고 그 밑으로 감각 신경세포가 이동하게 하여 '통각'을 느끼는 피부까지 구현해 내며 상업화에 성공했습니다. 또한, 오가노이드 신경의 성장 방향을 조절하여 한 방향으로 연결하고 양쪽에서 신호를 측정하는 기술도 개발했답니다. 정 교수님께서 궁극적으로 꿈꾸는 2030년의 미래 모습은 바로 이렇게 피부로 감싼 조직을 바탕으로 감각을 느끼고 구동하며 생각까지 하는 '연성 임플란트(Soft Implant)'를 만드는 것입니다.
 
세포들의 단순한 결합을 넘어, 고차원적인 생명 현상을 칩 위에서 꽃피우는 이 경이로운 과정과 1+1이 3이 되는 기적의 비밀! 정석 교수님의 발표집과 영상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왜 사람들은 ‘눌러야’ 안심이 될까?

Gemini, SNL Korea
슬라임·왁뿌볼·키캡의 시대, 반복 자극에 끌리는 뇌에 대하여
 
최근 화제가 된 SNL 코리아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심각한 회의 시간에 한 직원이 쉴 새 없이 "도각 도각" 소리의 키캡 장난감을 누르며 안정감을 찾는 모습. 마냥 웃고 넘기기엔 우리 주변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멍하니 슬라임을 주무르거나, 단단한 왁스를 바사삭 부수는 '왁뿌볼' 등 감각 장난감(Fidget Toys)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처음엔 '왜 저렇게 끈적이는 걸 돈 주고 살까?', '의미 없는 키캡 소리가 대체 왜 유행일까?' 하는 단순한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Fortune Business Insights)'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감각 장난감의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26년 무려 95.7억 달러(약 12.5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리고 이 시장의 성장 동력으로, 스트레스 완화와 집중력 향상 도구로서의 수요 확대를 지목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눈과 귀에서 손끝으로

과거 유튜브를 점령했던 ASMR(자율감각쾌락반응) 콘텐츠와 최근 유행하는 슬라임, 키캡 장난감 등은 겉보기엔 전혀 달라 보입니다. 하지만 뇌과학의 관점에서 이 둘은 '예측 가능하고 반복적인 감각 입력'이라는 점을 공유합니다.
 
우리의 뇌가 이러한 '반복 자극'에 얼마나 확실하게 안정을 느끼는지는 기존의 ASMR 연구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2018년 국제학술지 PLOS ONE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ASMR과 같은 감각 자극을 경험할 때 사람들의 심박수가 유의미하게 감소하는 객관적인 생리적 반응이 관찰되었습니다. 즉, 뇌가 패턴을 예측할 수 있는 일정한 자극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신체를 이완시키는 반응을 유도한다는 것이죠.
 
최근 유행하는 감각 장난감들은 이러한 반복 감각 자극이 촉각 중심으로 확장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시청각 콘텐츠에는 없는 ‘물리적 통제감’까지 더해진 것이죠. 매일 쏟아지는 정보 과부하와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슬라임이나 키캡은 내가 누르는 만큼 일정한 저항감을 주고 정확히 예측 가능한 소리를 냅니다. 내 손끝에서 완벽하게 통제되는 이 작고 예측 가능한 피드백이 지친 뇌에는 강력한 '안정제'로 작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남들은 힐링된다는데, 나는 왜 고문 같을까?
 
하지만 슬라임의 미끌거림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거나, 키캡 소리에 짜증이 나는 분들도 분명 계실 겁니다. "다들 편안하다는데 왜 나만 예민하게 받아들일까?" 싶으셨다면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이는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뇌의 신경망 배선이 다르게 세팅되어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차이입니다. 신경학계에서는 이를 감각 처리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슬라임처럼 낯선 질감에 극도의 불안과 거부감을 느끼는 현상은 '감각 방어(Sensory defensiveness)', 특히 촉각 방어로 봅니다. 그리고 특정 반복 소리(씹는 소리, 클릭 소리, 타건음 등)에 강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현상은 '미소포니아(Misophonia)'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2021년 국제학술지 《신경과학저널(Journal of Neuroscience)》에 발표된 뉴캐슬 대학교 연구팀의 논문 「The Motor Basis for Misophonia」는, fMRI 분석 결과, 미소포니아를 겪는 사람들은 청각을 처리하는 피질과 얼굴 및 입 주변의 운동을 담당하는 피질 사이의 신경 연결망이 일반인에 비해 강한 연결성을 보였다고 보고했습니다. 단순히 소리에 예민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행동 소리가 내 뇌의 운동 신경을 강제로 자극하는 반응을 일으킨 것이죠. 남들에게는 편안한 백색소음이나 일상적인 생활음이, 누군가의 뇌에서는 즉각적인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을 일으키는 경고음으로 번역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상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감각 장난감의 유행을 두고 일각에서는 종종 "짧은 도파민에 중독된 시대"라고 단편적으로 평가하곤 합니다. 하지만 과학이 가리키는 방향은 조금 다릅니다.
 
슬라임과 왁뿌볼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상한 것도 아니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뒤처진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이 낯선 유행은, 사람들이 과도한 자극과 스트레스 속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감각적 안정감’을 찾고 있다는 신호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부드러운 촉감에서, 누군가는 경쾌한 파열음에서, 또 누군가는 자극이 없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말입니다.
 
이번 호를 계기로, 남들의 유행을 좇기보다는 나의 뇌가 가장 편안해하는 '나만의 감각'이 무엇인지 다정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어떨까요?
발행인 : 최종현학술원 과학혁신2팀 | 이주섭 팀장, 이우원 PM, 전소민 PM
뉴스레터 수신을 원치 않으시면 [수신거부]를 클릭하신 후 메일주소를 발송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