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킬로미터가 세계를 멈췄다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를 잇는 호르무즈 해협. 가장 좁은 지점의 폭이 고작 33km인 이 물길로 하루 약 2,000만 배럴, 연간 약 900조 원 규모의 원유가 지나갑니다. 전 세계 LNG의 20%도 이 길을 쓰죠. 미국은 이란 공격을 시작할 때 전쟁이 짧게 끝날 거라 봤습니다. 착각이었죠. 신정국가 이란은 베네수엘라와는 다른 나라였고, 전쟁은 안타깝게도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어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 3,000척이 다니던 해협은 사실상 봉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란은 4월 2일, 오만과 함께 통행 선박에 허가증을 받도록 하는 프로토콜을 만들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란 외무부 차관의 말은 담담하지만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전쟁 이전의 규칙이 적용될 것으로 기대해선 안 된다." 각자도생, 나라마다 다른 탈출구를 찾다 전쟁의 충격은 즉각적이었죠. 특히 아시아 가스 가격은 전쟁 발발 이후 60% 이상 급등했습니다. 호르무즈를 통과하는 석유와 가스의 약 90%를 받아 쓰던 아시아 각국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빠른 선택은 석탄이었죠. 한국은 석탄화력발전소 가동률 상한(80%)을 해제했고, 일본은 노후 석탄발전소 제한을 1년간 풀었습니다. IEA가 작년 12월 "2027년까지 세계 석탄 수요 1.4% 감소"를 전망했지만, 블룸버그는 그 전망이 이제 실현 가능성이 크게 낮아졌다고 평가했습니다. 원전으로 방향을 튼 곳도 있습니다. 가장 극적인 건 대만입니다. 후쿠시마 이후 탈핵 노선을 고집해온 대만이 원전 재가동 검토에 나섰습니다. 재생에너지로 눈을 돌리는 움직임도 빠릅니다. 유럽에서는 분쟁 시작 한 달 만에 태양광 패널과 히트펌프 설치, 전기차 구매가 급증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 대한민국 정부의 선택 정부는 이번 사태를 에너지 전환의 '가속 페달'로 삼겠다는 입장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재생에너지로 전환을 대대적으로 하자"고 발언했고, 정부가 제출한 전쟁 추경안에는 재생에너지 확대 예산 약 3,110억 원이 담겼죠. 일각에서는 "원전을 더 지었으면 호르무즈 걱정을 덜 했을 것"이라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에너지를 둘러싼 정치는 언제나 뜨거운 것 같습니다. 한편 4월 3일 방한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핵연료 기업 오라노와 원자력 연료 공급망 강화 MOU를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신규 원전 2기·SMR 1기 건설 후보지 공모도 진행 중입니다. 정부가 작년 초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수립된 원전 건설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기로 한 데다 에너지 수급 위기가 커지면서 신규 원전 건설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한국에서는 공존 가능할까 각국의 대응을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어느 나라도 단 하나의 에너지원으로 이 위기를 버티지 못합니다. 석탄을 더 태우고, 원전을 다시 꺼내고, 재생에너지로 전환을 서두르고, 석유 비축을 늘리는, 결국 모든 카드를 동시에 꺼내 든 것이죠. 에너지 안보란 특정 에너지원에 대한 맹신이 아니라, 균형 잡힌 에너지 믹스(Energy Mix)에서 나온다는 걸 이번 사태가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에너지 믹스란 전기를 만들 때 화석에너지, 원전, 재생에너지를 각각 얼마나 쓸지 정하는 구성이죠. 그렇다면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동시에 확대하는 전략, 실제로 가능한 걸까요? 회의적인 시각도 분명히 있습니다. 최근 보스턴대 벤저민 소바쿨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원전 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재생에너지 의존도가 낮고,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에너지 기획은 제로섬 게임에 가깝고, 한정된 예산과 인력은 결국 어느 한쪽으로 쏠린다는 논리이죠. 그러나 한국은 조금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한국은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원자력 기술(APR-1400)과 태양광 기술을 동시에 갖춘 몇 안 되는 나라입니다. 두 기술을 모두 가진 나라가 제대로 된 로드맵을 갖춘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에너지, 결국은 선택과 합의의 문제다 지금 필요한 건 특정 에너지원의 선택이 아니라, 이 서로 다른 목표를 어떻게 균형 있게 맞출 것인가에 대한 설계입니다. 외부 충격에 민첩하게 대응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탄소를 줄이고, 동시에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비용 안에서 작동하는 구조 말입니다. 이 구조의 설계는 자연스럽게 숙의와 합의를 요구합니다. 어떤 비용을 감수할 것인지, 어떤 위험을 받아들일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기술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선택의 문제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