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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주의 과학] vol.29 과학기술의 시대, 결국 우리를 남게 하는 것은..

2026. 03. 31

 

과학의 최전선에서 전하는 인사이트 『요주의 과학』 

 

안녕하세요 여러분, 『요주의 과학』입니다.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될수록 우리는 더 빠른 기술, 더 큰 투자, 더 눈에 띄는 성과에 먼저 시선을 빼앗기곤 합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미래는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과학이 어떤 제도 속에서 자라고, 어떤 정치·행정 구조와 연결되며, 어떤 기초연구가 전혀 새로운 시대를 여는지, 그리고 그 모든 변화 속에서 인간은 어떤 태도를 선택해야 하는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번 호는 평소보다 많은, 세가지 소식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먼저 과학강국의 기반이 무엇인지, 정치·행정·과학의 관계를 통해 짚어보고, 이어 2025년 튜링상이 다시 조명한 양자정보과학의 출발점을 따라가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통해,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끝내 무엇이 중요한지 돌아봅니다.

 

(※스포주의) 세 번째 글에는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으신 분들은 해당 글을 가볍게 건너뛰셔도 좋겠습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STEPI 제14대 원장님을 지내신 과학기술정책 전문가이시자 국가우주정책연구센터를 이끄셨던 조황희 국가우주정책연구센터장님의 발표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과학기술 전쟁의 시대, 숫자는 이미 충분히 뜨겁다

 

오늘날 세계는 과학기술 전쟁의 시대를 지나고 있죠. 2022년 기준 전 세계 R&D 투자 규모는 3조 1천억 달러에 이르렀고, 미국은 30%, 중국은 27%, 한국은 3% 수준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풀타임 연구자 수 역시 800만 명 규모에 이르며, 국가 간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숫자만 보면, 자연스럽게 '누가 더 많은 예산을 쓰는가, 누가 더 많은 연구 인력을 확보하는가, 누가 더 빨리 기술을 선점하는가'가 과학강국을 정한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조황희 센터장님은 그 자원을 어떤 구조 속에서 전략으로 전환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미국은 왜 과학기술부 없이도 강할까?

 

세계 최대 과학기술 강국인 미국에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처럼 별도의 과학기술 전담부처가 없습니다. 과거 미국에서도 과학기술부 신설 시도는 있었는데, 정부 내 전담부처가 생기면 과학의 자율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과학계의 강한 반발로 결국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과학기술 커뮤니티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의제를 담은 보고서를 내고, 정치권은 그 보고서를 토대로 예산을 배분하고 제도를 설계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답니다. 반면, 한국은 과학기술 전담 부처가 존재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STEPI나 KIST 같은 연구기관의 보고서 역시 일정한 행정 방향과 정책 질서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이 곧바로 약점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자율성과 독립성의 측면에서는 다른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과 정치는 멀어야 할까, 함께 가야 할까?

 

아마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닐 거예요. 과학이 정치에 종속되어서도 안 되지만, 사회와 분리된 채 존재할 수도 없으니까요.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최종현학술원 상하이 포럼 리뷰 콘텐츠 '원탁의 옵저버 in 상하이' 편에서 이준호 서울대 교수님께서 남긴 한마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과학과 정책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 역시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지나며 과학과 정치의 긴장, 정책 개입과 자율성 논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중요한 것은 제도의 이름보다, 실제로 과학의 독립성과 정책의 책임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왜 ‘기획’에 그렇게 오래 투자하는가!

 

미국과 일본은 연구개발에서 예산 집행 이전의 기획 단계에 매우 오랜 시간을 투자합니다. 반면 한국은 연초에 기획하고 4월에 바로 시작하는 식의 촉박한 구조가 반복되면서, 기획 역량이 충분히 축적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왔어요. 우리나라의 R&D 예산 집행 절차는 촘촘한데 반해 준비 시간이 짧으니, 장기적 설계보다 단기 대응이 앞설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최근 PBS(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가 폐지되면서, 한국 연구 현장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제도가 바뀌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이제는 과제를 따내는 방식의 경쟁만이 아니라, 기관과 공동체가 얼마나 장기적인 연구 방향을 그리고 전략을 세울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답니다. 이전보다 더 큰 자율성이 생긴 만큼,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의 기획 역량과 책임 있는 운영 능력이 필요해졌습니다. 지금부터는 정말! 잘 설계하는 쪽이 앞서게 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과학공동체의 신뢰와 목소리

 

앞으로 필요한 것은 과학단체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사회를 향한 설득력 있는 목소리일 것입니다. 동시에 과학기술인은 사회적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그 제도를 움직이는 주체가 신뢰받지 못한다면 장기적인 지지를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과학강국은 예산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과학의 자율성을 지키면서도 정책과 연결될 수 있는 구조, 장기 전략을 설계할 수 있는 행정 역량, 그리고 사회가 믿고 기꺼이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과학공동체가 함께 있어야 겠죠. 앞으로 한국 과학기술계는 누가 방향을 말하고, 누가 전략을 설계하며, 누가 신뢰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더 자세한 내용은 조황희 센터장님의 발표집을 통해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튜링 이후 질문, 이제는 ‘신뢰’를 묻는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2015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처음 던진 사람이 앨런 튜링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튜링 테스트’의 출발점이죠. 최근에는 GPT-4.5가 이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기계의 ‘지능’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컴퓨터 시대의 출발점을 만든 튜링의 이름을 딴 상이 있습니다. 바로 튜링상. 컴퓨터 과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흔히 ‘이 분야의 노벨상’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올해 이 상을 받은 인물은 찰스 베넷(Charles H. Bennett)질 브라사르(Gilles Brassard)입니다.

 

이들이 한 일은, 정보를 다루는 방식 자체를 바꾼 것에 가깝습니다. 1980년대 두 사람은 누군가 정보를 몰래 들여다보는 순간 그 사실이 반드시 드러나는 암호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이를 ‘양자 키 분배(QKD)’라고 부르는데, 핵심은 간단합니다. 정보를 측정하는 행위 자체가 그 정보를 바꿔버린다는 양자역학의 성질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중간에서 신호를 훔쳐보는 순간, 그 흔적이 반드시 남고, 통신하는 당사자들은 이를 즉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기존 암호가 ‘풀기 어려운 문제’에 의존했다면, QKD는 아예 훔쳐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를 만든 셈입니다.

 

이어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보를 물리적으로 옮기지 않고도 그 상태를 다른 곳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개념, 이른바 ‘양자 원격전송’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입자 자체를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두 입자가 얽혀 있는 상태를 이용해 한쪽의 정보를 다른 쪽으로 ‘재현’하는 방식입니다. 얼핏 들으면 순간이동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얽힘과 고전적 통신이 결합된 정교한 과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보의 복사나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들렸지만, 이 아이디어들은 이후 세계 각국이 주도권을 갖기 위해 경쟁하는 양자 통신과 양자 컴퓨팅의 핵심 기반이 되었습니다.

다행이게도 이번 수상자 중 한 명인 찰스 베넷을 2023년 최종현학술원에서 모셔 강연을 부탁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기술적 디테일보다, 우리가 이미 들어선 ‘정보 위기’에 더 주목했습니다. 딥페이크와 가짜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사후에 진위를 가려내는 것보다, 애초에 정보가 생성되는 순간부터 신뢰를 보장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를 위해 타임스탬핑암호기술 같은 비교적 단순한 도구가 오히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 튜링은 “기계가 지능을 가질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능을 가진 기계가 만들어내는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우주에서 배운 다정함의 조건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2026

우주 끝에서 만난 가장 ‘비현실적인’ 다정함: 『프로젝트 헤일메리』

 

오늘은 우리가 평소에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가끔은 그 의미를 잊고 사는 '다정함'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먼저 제 마음을 꽉 채웠던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요? 약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온전히 감상하고 싶으신 분들은 스킵하셔도 좋겠습니다.

 

영화는 인류를 위협하는 우주적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떠난 우주선에 남겨진 한 남자가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주인공 ‘그레이스’는 점차 자신의 상황과 임무를 파악해 나가고, 그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 - 외계 생명체 ‘로키’를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이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일종의 ‘우주 버디 무비’입니다.

 

두 존재는 생김새도, 언어도, 사고방식도 완전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서로의 신호를 해석하고, 의미를 맞춰가며 언어를 만들어 나갑니다. 기술을 공유하고 문제를 함께 풀어가면서도, 끝까지 서로를 ‘이해 불가능한 타자’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낯설다는 이유로 배제하지 않는 태도, 그 자체가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이후 주인공이 기억을 되찾으면서 드러나는 사실은 더 아이러니합니다. 인류를 구한다는 ‘대의’ 아래, 그레이스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 임무에 내던져진 인물이었습니다. 인류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개인에게는 강요된 희생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인류와 에리드인을 모두 구하게 되는 순간은 전혀 다른 곳에서 만들어집니다. 명령도, 계산도 아니라, 서로를 믿고 돕는 우정에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인류를 구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려는 ‘초월적 다정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협력하는 종'으로 진화한 비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우리는 외계 생명체를 떠올릴 때 흔히 영화 <에일리언>처럼 위협적인 존재를 먼저 상상합니다. 그렇다 보니 『프로젝트 헤일메리』 속 ‘다정한 외계인’이라는 설정은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정말 다정한 외계인은 비현실적인 상상일까요?

 

인간의 진화를 ‘다정함’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낸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이 질문에 꽤 흥미로운 답을 내놓습니다. 인간이 살아남은 이유는 더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협력적이고 덜 공격적인 방향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서로의 표정을 읽고, 시선을 따라가고, 손짓만으로도 의도를 전달하며, 낯선 존재와도 신뢰를 만들어가는 능력이 인류의 경쟁력이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다정함’은 선택적인 미덕이 아니라, 문명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가까운 성질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정함의 이야기에는 숨은 반전이 있습니다. 이 다정함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먼저 작동합니다. 우리를 지키려는 다정함은, 동시에 ‘그들’을 배제하거나 비인간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평화로운 영장류’로 알려진 보노보도 집단 내부에서는 협력적이지만, 낯선 개체 앞에서는 누구보다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다정함은 보편적 성질이 아니라, 집단의 경계 안에서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능력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영화 속 설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류를 살리기 위해 한 개인의 선택을 지워버리고, 그를 우주로 내보내는 결정은 ‘우리’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한 개인에게는 잔인한 방식이었습니다. 결국 다정함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우리'를 어디까지 확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드는 힘입니다.


그리고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특별한 이유는, 그 다정함이 인간을 넘어 전혀 다른 존재 - 외계 생명체 로키에게까지 확장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낯섦을 넘어 관계를 선택하는 그 장면이, 이 이야기를 더 오래 남게 만듭니다.

발행인 : 최종현학술원 과학혁신2팀 | 이주섭 팀장, 이우원 PM, 전소민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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