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선대회장' 시대
기업들 너도나도 '선대회장 살리기'
“아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그동안에 상당한 변화가 많습니다.”
동국제강그룹이 지난 7일 창립 71주년을 맞아 유튜브에 올린 ‘시간의 대화’라는 5분 남짓한 영상은 이 목소리로 시작한다. 음성의 주인공은 지난 2000년까지, 44년간 동국제강을 이끈 고(故) 장상태 선대 회장이다.
흑백 영상에 등장한 장 선대 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생산 현장 곳곳을 누비고, 도면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이는 등 생생하게 움직인다. 동국제강 관계자는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던 자료를 인공지능(AI)으로 가공해 생전 선대 회장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영상화한 것”이라고 했다.

기업들이 인공지능(AI)으로 선대 경영자의 육성과 모습을 잇따라 복원하면서 이른바 'AI 선대회장'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고 장상태(가운데 선글라스 낀 이) 동국제강그룹 선대회장이 도면을 가리키며 지시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해낸 AI 영상의 한 장면. /동국제강그룹
지난해 11월엔 AI로 복원한 SK 최종현 선대 회장이 ‘한국고등교육재단’ 50주년 기념 행사장 스크린에 등장했다. 재단 초대 이사장인 최 선대 회장의 ‘AI 아바타’가 본인의 흉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안 닮았어” 하고 고개를 젓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SK그룹은 앞서 지난 2018년에는 최 선대 회장을 ‘홀로그램’으로 복원했는데, 수년 새 기술이 더 발전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지난해 10월 삼양그룹의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에선 “앞길에 더 많은 난관이 있더라도 전진을 주저하지 말라”는 고 김연수 창업 회장의 ‘AI 음성’이 울려 퍼졌다.
요즘 재계에선 “대기업의 ‘AI 1호 과제’는 선대 회장 살리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AI 선대 회장’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 AI 기술로 창업 혹은 선대 회장의 음성, 모습을 복원해 등장시키는 기업들도 빠르게 늘고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 광고 대행사 이노션이 ‘생성형 AI TF’를 만들고 첫 프로젝트로 추진한 것 역시 ‘정주영 선대 회장 육성 복원’이었다. 생전 육성 데이터 수백 개를 활용해 AI에 평소 말 습관과 속도는 물론 감정 변화까지 학습시켰다. 이렇게 복원한 정주영 회장의 육성은 2023년 울산 전기차 신공장 기공식에서, “머지않아 한국 자동차가 세계 시장을 휩쓰는 날이 온다고 나는 확신합니다”라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지난 2023년 울산 현대차 공장 기공식에서 AI로 복원한 육성과 함께 등장한 고 정주영 선대회장의 모습. /뉴스1
기업들은 왜 ‘AI 선대 회장’을 만드는 것일까. 한 대기업 관계자는 “주력 사업이 대부분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선대 경영자의 창업 정신이라는 ‘헤리티지(heritage·유산)’를 되살리는 게 각 기업의 화두”라며 “이 같은 분위기가 선대 회장을 AI로 복원하는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멀티미디어에 익숙한 Z세대 직원들에게 ‘창업 정신’을 강조할 때도, 딱딱한 문장이나 흑백사진보다는 눈과 귀를 곧바로 붙잡는 ‘AI 음성·영상’이 더 효과적인 측면도 있다고 한다.
AI 기술 발전도 한몫하고 있다. 시중의 AI 프로그램으로도 얼마든지 흑백사진을 컬러로 바꾸고, 정적인 사진을 동영상으로 바꾸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접근성이 높아진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선대 회장을 살리는 프로젝트라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고 귀띔했다.
조선일보 = 박순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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