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터리 산업, 국가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지탱해 온 핵심은 첨단 과학기술 기반의 산업이었다. 반도체와 자동차는 수출을 이끄는 쌍두마차였고, 최근에는 배터리가 제3의 전략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전기차, 에너지저장장치(ESS) 전력망뿐만 아니라 드론· 군수· 휴머노이드 등 신 산업 확장에 따라 배터리 산업의 장기 성장성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우리는 초기 휴대전화용 리튬이차전지 기술 선도를 바탕으로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도 입지를 다져왔다. 하지만 최근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산업정책의 일관성과 과감한 자금 투입으로 중국이 배터리 산업의 주도권을 빠르게 가져갔다. 중앙 정부는 토지를 무상 혹은 장기 임대로 제공하고, 지방 정부는 설비투자의 절반 이상을 지원한다. 산업용 전기요금은 한국보다 30~40% 이상 저렴하다. 이처럼 기술이 아닌 고정비의 '비용 구조'에서 발생한 경쟁력 차이는 아무리 기술개발 노력으로 극복하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게다가 중국은 보조금에 의존하던 기업들을 구조 조정하고, 퇴출기업 인력과 기술을 CATL, BYD 등 대형 기업에 흡수시켜 전체 경쟁력은 강화하고 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생산 확대를 위한 대규모 설비 투자로 인해 재무 구조가 약화되고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세제 혜택이나 인허가 간소화에 머무는 정부 간접적 지원만으로는 경쟁력을 지키기 어렵다. 전기요금, 부지, 설비 등 고정비에 대한 직접적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 국부펀드나 각종 보조금 정책 등 해외의 첨단산업 육성 정책 사례를 참고해 한국에 적합하고 실효성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배터리는 제2의 반도체이자, 자동차 산업과 직결된 전략 산업이며 모빌리티·에너지 산업 전반과 연결되는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국가 핵심 기술이기 때문이다.
현재 글로벌 3대 전기차 시장 중 중국은 자국 기업 독식 체제로 굳어졌고, 유럽은 한국 기업이 중국 기업과 치열하게 경쟁하고있다. 반면 향후 전기차 시장 성장 잠재력이 가장 큰 미국 시장에서는 한국 배터리 기업이 60%를 상회하는 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미·중 갈등 속에서 한국의 기술력과 신뢰에 기반한 미국 내 배터리/전기차 시장 확대는 한국이 첨단산업에서 재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 레버리지다.
이제는 '기술=자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불공정한 격차를 줄이기 위한 과감한 직접 투자, 그리고 새로운 질서에 맞는 전략적 유연성을 병행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중국과의 기술 차단, 공급망 단절에 초점을 맞췄지만, 글로벌 경쟁력이라는 큰 틀에서 상호 협력에 대한 가능성도 검토가 필요하다. 산업 경쟁은 이제 속도보다 구조이고, 기술만이 아닌 조건의 싸움이다. 지금이 바로 대한민국 첨단산업의 미래를 지키고 확장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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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석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서울대 이차전지혁신연구소 소장